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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포 깃발이 휘날리던 중정리

  • 작성자전체관리자
  • 작성일2018-01-03 00:55:10
  • 조회수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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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리_1
부여읍 중정리는 왕포리와 염창리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시내 중심지로부터 동남쪽 부근에 자리를 잡고 나즈막한 언덕에 둘러싸여 큰 금강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은 하구둑과 보로 인해서 범람하는 일이 없지만 비가 많이 내리면 왕포천 제방까지 넘치기도 한다.

몇해 전부터 배수장 사업이 진행돼 침수피해는 한숨 돌렸지만 여전히 왕포천을 따라 서 있는 암벽들까진 위험재해지구다.
중정리는 서쪽으로 왕포리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부여나성(동나성) 남쪽 끝자락으로 염창리 사이에 있다.
중정리_2

곡정이와 당리, 동리, 말랑이, 모정, 옷바위, 중리, 창머리, 서낭당 등의 부락이 조성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중심은 중리와 구정인 듯 하다. 구정은 아홉개의 우물이라는 뜻의 한자다.
당리는 중리 남서쪽에 있으며 당산이 있어 편안하다는 뜻을 지녔다. 문화유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동리는 중리 동쪽 마을에 언덕을 등지고 있으며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이 근방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모정은 중리 남쪽에 있으며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동리에는 또 다른 낙화암 전설도 전해온다. 사실상 이야기를 파헤쳐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중정리_3
강을 끼고 있는 이 길에는 바위절벽을 더러 볼 수 있다. 치마바위라 불리는 곳은 정확히 찾을 수 없었다.

왕포천을 끼고 있는 치마바위라 불리는곳 정상에는 이곳을 지키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바위 한 가운데에 사각형 말통이 들어가고, 그 밑에 다시 한 됫박이 들어가는 크기의 구멍이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사적연구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을 조사하던 당시 바위에서 이러한 모양이 발견됐는데, 사람들은 꽃바위라 부르거나 낙화암이라고 얘기하기도 했었단다.

그러나 실제는 대왕포가 자리하고 강이 휘돌이 굽이쳐 도성으로 들어오는 초입 길에 만날 수 있는 요충지다. 배가 남쪽에서 들어올 때 도성의 입구인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깃발이 필요해 이곳에 꽂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다.

또 설화에도 후궁이 이 바위를 지키던 군졸과 살면서 당나라군과 싸우다 죽었다는데 그때부터 이들이 지켜왔던 바위가 치마처럼 보며 치마바위, 꽃바위라 불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꽃바위는, 꽂바위가 잘못 해석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말과 되크기의 바위구멍에 큰 깃대를 꽂아 경계를 알리는 등의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강이 무척이나 컸던 이 마을은 장암으로 넘나다니던 나루터가 두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장성나루와 황바우나루다. 대왕포구에는 큰 배들이 드나들고 주변에 이동은 나루가 대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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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동리 부근에 있는 한옥 고택에는 부양재와 김거익의 묘가 있는데, 부양재는 고려 말기 정당문학으로 나라가 망해갈 때 부여에 은거한 김거익 선생이 절의를 지킨 곳이다.

충절도, 자원도, 그림도, 이야기도 있는 이 마을은 중정리다.



대왕포 깃발이 휘날리던 중정리 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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