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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을 닮은 치유 화가 정봉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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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그릴 때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우선이라는 정봉숙 화가. 그녀는 자신의 그림으로 잠시나마 보는 이가 고통을 잊고 잠시나마 삶의 따뜻함과 위로를 느낄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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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그림은 유독 색채가 맑고 아름다운 여성, 연꽃 등의 꽃이 많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그림을 보면 그렇게도 우는 이들이 많았다.

어떤 이는 그녀의 멱살을 잡고 ‘당신은 이렇게 행복하냐. 나는 너무 힘든데’라고 외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작품을 보자마다‘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며 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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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만 담고 있는 듯했던 그녀에게도 30년간 작품을 내지 못한 시간이 있었다. 어릴 적, 르누아루의 소녀상을 보고 저 나이가 되면 더 잘 그리겠다는 결심을 하던 그녀를 지지해주던 부모님. 여장부 혹은 태산 같던 어머니가 연거푸 3번을 쓰러지신 후 아기가 됐을 때, 그녀는 참 많이도 울었다.

엄마가 아프시다는 것에 대한 충격과 꿈의 연장에 대한 막막함 등 복잡한 감정이었을테다.

그러던 중, 어머니보다도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그녀는 어머니의 눈빛에 담긴 외로움을 보았다.

오른쪽은 마비가 있었지만 정신만은 또렷하셨던 시기에 그녀는 어머니의 왼손에 크레파스를 쥐어드렸다. 왼손에 크레파스를 쥔 어머니의 손은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 뒤로 그녀는 간간히 입시생들을 가르치며 풀어내던 본인의 그림도 접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어머니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어머니의 전시회를 열던 날, 어머니는 보행보조기를 짚고 일어서셨다.

“저는 엄마에게 24시간 올인해서 지냈지만 행복했어요. 마지막엔 엄마가 정말 하루도 못 살 정도로 몸이 완전히 마르고, 피부도 그렇고… 그때 저랑 눈빛을 마주하면서 그림을 못 그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반을 작품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그림 70점의 인물화를 들고 무작정 인사동으로 가지고 갔다.

“그때는 사실 작품을 가지고 서울로 가면서도 두려웠죠. 30년만의 그림을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림에 대한 반응이 어떨까 했죠. 그래도 한 사람도 안 봐도 좋다. 한 점도 팔리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작품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작품을 갤러리에 걸기도 전에 사람들이 갤러리에 들어섰고, 어떤 이는 소리를 질렀다. 강찬모 화가는 그녀의 작품을 보고 인사동의 그림은 팔리기 위한 절름발이 그림이 많은데 눈치 보지 않고 그린 그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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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이후 그녀는 9번의 초대전을 열었다.

특히 이번 연꽃갤러리에서 7월 1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되는 부여군 축제팀 초대전, 사람과 연화 그리고 생명전 -5시리즈‘Bright Love 내사랑 빛이 되어’는 서동연꽃축제와 연계해 문화예술의 격을 높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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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아버지랑 오빠랑 맨날 궁남지에서 노닐다 보니 저희 집 건줄 알았어요. 그때는 궁남지가 방죽이어서 진흙 속에 허름한 포룡정만 있었거든요. 아버지가 지게로 회초리 같은 걸 메고 다니면서 꽂아두던 것들이 지금의 버드나무예요. 어머니가 새참을 지고 가던 곳들이 연밭이 됐죠. 기억이 너무 생생해요.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연꽃도 그리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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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숙 화가는 유난히 모작이 많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영광이라며 웃는다.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이유다. 따뜻하고 애잔한 기억으로 행복함을 담는 그림. 색채부터 붓터치 등 하나부터 열까지 다를 수밖에 없다.

“전 그냥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행복하려면 우선 건강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기본이죠. 그렇게 제 행복을 남에게도 전했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저든 제 그림이든 맑고 따뜻한 기운으로 다가가고 싶어요.”



연꽃을 닮은 치유 화가 정봉숙 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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