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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천황 부여를 탐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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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충사
▲삼충사 전경. 일제강점기, 일본은 이곳에 대륙경영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궁을 건립하려 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신궁을 지을 위치로 한반도 중에서 부여를 택했다. 1939년 7월 31일. 일본 천황은 라디오를 통해 직접 신궁공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 비용보다 8만원이 많은 총 24만원이 투입된 대규모 공사였다. 일본 이세이에 있는 신궁과 동일한 규모로 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필 왜 ‘부여’에 신궁을 건립하려 했을까?
신궁을 건립하던 위치는 부소산성 내 ‘삼충사’가 서 있는 곳이다. 위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판단이다. 삼충사 경내에서 도심이 훤히 바라다 보이고, 북서쪽에서 휘돌아 내려온 금강이 부소산을 거쳐 큰 들판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내려가고 있는 형상이다.


부여여고 앞 주유소 뒤로 이어진 남령공원 산맥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은 모두 도로로 포장이 돼 있고, 주택과 상가들이 들어섰지만, 부소산과 남령공원, 금성산을 잇는 지맥이 있는 곳이다.


신궁은 결국 지어지지 못했지만 이유는 ‘조상’의 개념이라는 게 현재의 시각이다. 말 그대로 일본이 백제의 문물을 받아들여 장성했고, 그에 대한 정통성을 확보하는 ‘내선일체’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보편적이다.


또 다른 주장은 부여가 대륙을 잇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대륙경영을 꿈꿨던 일본이 한성 대신에 부여를 한반도의 중심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대륙경영의 수호신인 관폐대사를 위한 신궁이어서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며 국호를 ‘부여’로 바꾼 것과 일본의 천황이 중요하게 신경을 쓸 정도로 신궁건립을 하려 했던 그 무엇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일본천황 부여를 탐내다 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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