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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궁녀의 오해와 진실

  • 작성자이용우군수
  • 등록일2017-07-20 17:51:56
  • 조회수2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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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궁녀 (三千宮女)의 오해와 진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을 다 물 말아 먹은 원균을 정부는 이순신과 나란히 1등 공신에 책봉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해동증자’라 불리며 성군 소리를 들었고,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벌이던 의자왕(?~660, 재위 641~660)을“음란과 향락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고 간신들에게 놀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가 E.H카는“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 굴절되어 온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어땠을까?
언어를 같이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를 두고 서로 경계하고 다투던 시절이 삼국시대다. 이 무렵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라의 세(勢)가 약했다. 힘이 약하다 보니 외세를 끌어들이고 연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18만 나당연합군의 말발굽에 짓밟힌 한반도 8월의 영토가, 여인과 아이들의 처절했던 절규가 그리고 비참했던 삶이 눈에 선하다. 자주적인 통일이 아쉬운 부분이다. 과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한 후 통쾌하기만 했을까?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이를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이 의자왕을 못된 군주로 폄하해야만 했던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김부식(1075∼1151)은 『삼국사기』를 저술하기 전부터 나당연합의 당위성과 고구려와 백제 멸망의 필연성을 염두에 두고 각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편찬 당시 참고할 수 있는 사서가 상대적으로 신라에 관한 것이 많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면 최근 tvn 프로그램‘알쓸신잡’을 통해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삼천궁녀(三千宮女)’라는 단어는 어디에서부터 유래 되었을지가 궁금하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연의‘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후궁이라는 표현과 타사암(墮死岩)이라는 지명만이 등장한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이자 고려 후기 학자인 이곡(1298∼1351)의『가정집』에 수록되어 있는‘주행기’와‘부여회고’에도 각각 낙화암이라는 지명과 낙화라는 시어가 보일 뿐이다.

‘삼천궁녀’는 궁녀의 많음에 대한 최상급 과장어라 할 수 있다. 고려말까지의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던 단어가 조선 초기로 들어오면서 김흔의‘낙화암’조위의‘부여회고 차가정운’민제인의‘백마강부’등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다.‘삼천’이란 숫자가 백제사의 실제 사실에 바탕을 둔 표현이 아닐 것임은 누구나 쉽게 단정할 수 있는 일이다. 이쯤에서‘3천명의 궁녀가 꽃잎 흩날리듯 떨어져 죽었다’는 문학적 표현의 낙화암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말이 3천이지 그 많은 인원이 한 끼 밥 먹을 걱정도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 1개 사단이 1만 2천명 정도이고 1개 연대가 3천 정도인 점을 감안해 보면 짐작이 간다. 기거할 방과 가재도구며 옷가지 등을 어림잡아 추산하더라도 3천이란 숫자가 실제가 아닌 어떤 상징적 의미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제인의 ‘백마강부’의‘궁녀 수 삼천’이라는 말도 문인들의 문학적 상징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학자들의 三千에 대한 해석은 명쾌하다.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황인덕 교수는 ‘부여 낙화암 전설의 형성과 전개’라는 논문에서 중국의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의 장한가(長恨歌)에 보이는 후궁가려삼천인(後宮佳麗三千人, 후궁은 아름다운 삼천명 있었지만) 천총애재일신(三千寵愛在一身, 삼천의 총애는 오직 한몸에 있네) 같은 시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三千은 숫자로 3천명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로 쓰인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망여산폭포 (望廬山瀑布)’라는 시에 "날아 흘러 떨어지니 길이 삼천 척,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가(비류직하삼천척 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의하락구천 疑是銀河落九天)"라고 읊어, 폭포가 흘러내리는 모양을 호방하면서도 낭만적으로 묘사하였다. 또 다른 시‘추포가(秋浦歌)’의 한 구절인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과 더불어 중국 시인들이 흔히 사용한 과장법의 전형적인 예로 꼽힌다.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정민 교수의 입장은 명쾌하다.“사실 운자와 평측의 제약은 시상을 펴는 데 상당한 걸림돌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표현이 굳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한시에서 칠언시의 앞쪽 네 글자는 ‘평평측측’또는‘측측평평’둘 중 하나인데, 숫자가 들어갈 경우‘평평’의 조합은 숫자 전체를 통틀어‘삼천(三千)’밖에 없습니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니,‘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니 할 때 꼭 ‘삼천’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천도 오천도 안 되고 반드시 삼천이라야 합니다. 안 그러면 평측의 규칙이 무너지니까요. 의자왕의 삼천궁녀(三千宮女)도 이렇게 해야‘평평측측’이 되므로 삼천이지, 숫자로 세어서 3천은 아닙니다. 옛 중국 쪽 문헌을 보면 많은 궁녀는 무조건 ‘삼천궁녀’입니다. 부여 낙화암에서 궁녀 3천 명이 일시에 뛰어내리면, 나중에는 쿠션이 생겨 죽지도 못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삼천궁녀는 대단히 많은 숫자의 궁녀란 뜻일 뿐입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진시황 때 불로초를 찾아 떠난 동남동녀(童男童女)의 숫자도 삼천이었지요. 이렇듯 운자의 제약이 만들어낸 표현적 특성도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중국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조선시대의 한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낙화암(落花岩)과 삼천궁녀(三千宮女)는 사비강의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인한 고려말기부터 조선시대 풍류객들의 시적 소산물이다. 역사를 제대로 읽는 안목이 필요하다.

삼천궁녀(三千宮女)는 역사적이지도 사실적이지도 않다. 삼천궁녀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할 때다.